사우나에서

Posted in NOTES -------/- Notes | 2008/12/27 01:35
 
  한밤 중. 동네의 조그만 사우나 안에 있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없다.
대부분은 피곤하거나 아무 생각이 없는 얼굴이다. 물론 나도 그럴테지만.
카운터에 앉아 음료수나 면도기, 때밀이 같은 것들을 파는 남자가 있다.
남자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저 자리에서
태어나서 저 곳에서 그대로 늙어온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평상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남자, 발톱을 깍는 남자, 조용히 옷을 갈아입는 남자,
구석에 누워 잠을 자는 남자가 보인다. 특유의 사우나 냄새는 각자의
행위들을 하고 있는 벌거벗은 이들이, 암묵의 공감 같은 것을 갖게 해준다.
까만 먼지가 잔뜩 낀 선풍기가 딱딱 소리를 내며 연신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있다.

  탕 안으로 들어간다. 땀을 빼고 싶어 먼저 사우나에 들어간다. '보석 사우나'를
이용한다. 보석에서 나오는 게르마늄같은 것들이 여러모로 몸을 건강하게 해 준다는
설명이 붙어 있지만, 딱 봐도 절대 보석이 아닌 것 같은 허접한 장식으로 내부를
도배해 놓았다. 정체 모를 이 돌덩이들을 이렇게 뜨겁게 데우면 엄청난 양의 화학
호르몬이 방출되어 오히려 사람의 수명을 줄이는 게 아닐까, 싶지만 어쨌든 가만히
앉아 땀을 뺀다. 늦은 시각이라 탕 안에 사람이 많지 않다. 까부는 아이를 데리고
온 아빠도, 여러 명이 함께 와 미친듯이 떠들며 냉탕을 휘젓는 친구들도 없다. 그저
몇몇 사내들, 뱃살이 늘어진 몇몇 사내들이, 오래 전에 괘도를 잃고 떠돌아다니는
우주선 안을 부유하는 죽은 우주인들처럼 멍하게 앉아 있고, 누워 있다.
  아주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싶어 열탕에 들어가려다가 멈칫한다. 더럽다.
누군가가 오줌을 싼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기는 싫지만, 분명 누군가 무언가를
싸긴 쌌다. 열탕을 포기하고 온탕으로 들어간다. 온탕 역시 더럽기는 마찬가지다.
무엇인지 모를 까만 조각들이 수면 위를 둥둥 떠다닌다. 물을 언제 갈았을까. 아마
오늘 새벽에 한 번 갈았을 것이고 이른 새벽이나 되어야 다시 새 물로 갈 것 같다.
난 정체 모를 사내들이 정체 모를 노폐물을 푹 우려낸 물이, 최고로 정체가 없어진
시각에 나의 나체를 깊이 담그고 있다.
  소리가 나갈 곳이 없는 목욕탕이 내는 특유의 몽롱한 룸 톤에 귀가 먹먹하다.
이따금 들리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정신을 집중한다. 아주 작은 그 소리는
커다란 목욕탕 전체를 흔든다. 답답하면서도 나른하고 찝찝하면서도 개운한
느낌이 온 몸을 핥는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상한 광경이다. 한 공간 안에 사람들이 모여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자지를 덜렁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광경은. 그 중에서도, 탕 안에 놓여있는
의자에 벌러덩 누워 잠을 자고 있는 사내를 보았을 때가 가장 이상하다. 나름대로
가린다고 덮은 수건은 이미 벗겨져서 바닥에 떨어져 있다. 피하려고 해도 자기도 모르게
볼 수 밖에 없는 풍경들이 있다. 바로 이럴 때다. 기진맥진한 듯이 축 처져서 주인의
몸에 기대어 누워 있는 자지는 자기 주인보다도 더 지쳐보인다. 사실 우스운 광경이다.
그 남자가 밖에 나가 옷을 잘 차려입고, 예의를 갖추어 상대방과 악수를 하는 광경을
상상해보면 더욱 우습다.

  군대 훈련소에서의 여름이 생각난다. 가도 가도 끝이 없던 강원도 산골짜기의 훈련소는
그야말로 산과 계곡의 한 가운데에 고립되어 있었다. 한여름이었지만 밤에는 깔깔이를
껴 입어야할 정도로 추웠다. 물론 낮에는 보석 사우나에 앉아 있는 것처럼 더웠다.
  하루에 구보를 두 번씩 했는데, 일과를 시작하는 아침과 일과를 끝내는 저녁이었고,
한여름이었기에 저녁 구보는 언제나 웃통을 벗고 하는 알몸 구보였다. 한참을 소리를
지르면서 뛰고 나면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고, 불쌍하게도 담배 한 대 피지 못하는
아이들은, 그러나 분명 건강해지고 있었다. 오후 구보가 끝나면 교관들은 300명쯤
되었던 훈련병들을 훈련소 옆의 계곡으로 데리고 갔다. 우리를 씻기기 위해서였다.
-아마도 수돗물을 아끼면서 그 많은 냄새나는 나체들을 씻길 수 있는, 한 여름이니
가능한 대책이었을테지만- 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분명 좋은 방법이었다.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어찌 보면 예술적이기까지 했다. 300개가 넘는 벌거벗은
몸뚱이가 한 공간 안에서 첨벙이며 초저녁의 지는 햇살에 반짝이던 광경. 서로에 대한
어색함과 막연한 시간에 대한 두려움은 그 기이한 광경 안에서 철철 흘려 내려가는
계곡물과 함께 떠내려갔다. 계곡은 시원했고 건강했다. 난 찬란한 노란 햇살과 싱싱한
초록 풀과 투명한 파란 물이 넘실대던 그 거대한 목욕탕 안에서 누가 누구인지 구별되지
않는 노랗고 까만 몸뚱이들을, 어린 아이들처럼 물장구를 치고 첨벙대는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조금씩 딱딱해지는 근육을 문지르면서, 젊음을, 어떤 희망과 기대,
두려움과 허무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탕에서 나와 대충 비누로 몸을 씻는다. 어느 사우나에서나 볼 수 있는 노란 참외처럼
생긴 비누에 끼어 있는 털 몇 올을 걸러내고, 머리를 감고 얼굴을 씻고 몸을 닦는다.
수건 두장으로 몸을 닦고 탕을 나온다. 그다지 개운하지가 않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처음 들어왔을 때 보다 사람이 더 없다. 아까 TV를 보던 남자는 아직까지
같은 자세로 그것을 보고 있고, 카운터의 남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TV에서는 어느 드라마의 재방송을 하고 있는데, 남자가 특별히 드라마의 내용을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벽을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것 같이 단조로운 눈빛이다.
TV 속의 남자는 "이번 카지노 계약만 성사되면 끝나는거야. 그 전에 우선 해결해야
할 일들이 있어" 같은 대사를 하고 있다. 또 카지노 이야기인가. 다음 씬의 여배우는
라스베가스의 어느 고급 바에 앉아 매우 청순하면서도 가련한 표정을 지으려 애를
쓰고 있지만, 아무리 봐도 감독의 컷 사인이 언제 나올지만을 신경쓰고 있는 눈빛이다.
그녀의 친구는 마침 싸가지가 없는 부잣집 막내딸 같은 역할인데 아마도 여주인공의
출생의 비밀 같은 것을 알고 그녀를 괴롭히는 듯 하다. 마침 그 부잣집 막내딸의 아빠는
불륜 관계의 여자때문에 골치를 썪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가장 슬픈 건 여주인공이
사랑하는 남자는 불치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아 여자가 불치병에 걸린건가. 모르겠다.
그냥 늘 그렇듯, 그런 것들이 적당히 섞여서 나온다. 그래도 여주인공이 상당히 예쁘긴 하다.
너무 진한 화장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저 안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든 화장을 하고 있다.
잠을 자고 부스스 일어나는 연기를 하는 어떤 배우는 아주 긴 속눈썹을 붙이고 있다.
아마도 잠이 들 때 속눈썹을 빼면 죽게 되는 불치병에 걸렸나보다.

  남자는 채널을 돌린다. 심각한 표정으로 슬픈 사랑 노래를 부르면서 심하게 몸을 흔드는
댄스 가수가 보인다. 그 잔뜩 찡그린 얼굴 표정과 매우 역동적인 몸동작의 괴리가 재미있다.
그런 비슷 비슷한 댄스 그룹 몇개가 지나간다. 99900원짜리 여름 특선 블라우스 삼종
셋트를 입고 포즈를 잡는 모델들이 보인다. 난 그 중 한 모델이 예쁘다고 생각한다. 목에
핏줄이 선 채 어느 생명 보험의 혜택에 대해 설명하는 여자가 보인다. 괜찮은 인상이긴
하지만 그녀가 입은 촌스러운 블라우스가 눈에 거슬린다. 방금 전 지나간 99900원짜리
여름 특선 블라우스 삼종 셋트 중 하나일 것 같다. 그녀 옆에서는 어느 남자와 여자가
환호성을 지르면서, 그렇습니다~, 어머 어서 가입해야겠어요~ 같은 대사를 날리고 있다.
밤의 한 가운데에,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에 대비하여 보험에 가입하라고 목청껏 외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왠지 우울해진다. 누군가는 이 밤에 저 쇼를 보면서, 자신이 죽거나
암에 걸렸을 때 돈을 받기 위해, 전화기를 들고 저 보험에 가입할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하니 더 우울해진다.
  동료의 어깨를 밟고 힘차게 뛰어올라 반대 당 남자의 멱살을 잡으려는 어느 국회의원이
지나간다. 어느 여중생이 부모없이 두 동생을 기르면서 힘들게 학교에 다니지만 희망을
잃지 않는다고 말하는 나레이터의 목소리가 지나가고, 샌프란시스코의 게이 축제가
지나가고, 요즘 유행하는 코미디 프로의 재방송 -잠시 그걸 보다가, 채널을 돌리던 남자와
나는 동시에 어느 부분에서 짧고 힘없는 웃음을 터뜨린다.- 이 지나가고, 어느 연예인의
호화로운 신혼집이 지나가고, 북극의 녹아내리는 빙하가 지나가고, 미사일 폭격으로
폐허가 된 중동의 어느 도시에 널려 있는 시체들이 지나가고, 손에 2000원을 쥐고
죽은 채 발견된 어느 노숙자가 지나가고, 가장 멋진 골장면 베스트 파이브가 지나가고
신도들의 성원으로 해외에도 커다란 전당을 지었다며 더 많은 성금을 내주길 원하는
어느 목사님이 지나간다. '유러피안 룩', '아메리칸 스타일', '니뽄삘'이라는 자막이 깔린
우리 나라의 패션 관련 방송이 보여, 잠시 내가 사는 여기가 어딘지 헷갈릴 때 쯤,
조용하게 무심히 채널을 돌리던 남자가 TV를 끈다.
  남자는 주위를 한 번 휘 둘러본다. 나와 눈이 마주친다. 5만년쯤 자다 일어난 원시인이,
뭐 더 볼래? 라고 묻는 듯한 표정이다. 난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시선을 돌린다. 남자는
벌러덩 눕더니 이내 코를 곤다. 나는 잠시 코를 고는 남자를 쳐다보다가 까만 TV 화면을
바라본다. 까만 TV 화면에 내 얼굴이 비친다. 아직 옷도 입고 있지 않고 있었다.
개그 프로그램의 바보나 라스베가스의 바에 앉아 있던 여주인공보다도 멍청한 모습이다.
심드렁하게 누워 코를 골고 있는 원시인보다도 촌스러운 표정이다. 나는 잠시 눈을 감는다.
방금 눈 앞에 지나간 것들을 막연하게 떠올려 본다. 그것들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생각해 본다.
지난 시간들에 대해 생각해 보고, 앞으로의 시간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정신이 아찔하다. 탕에서 땀을 너무 많이 뺐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선풍기의 미지근한
바람이 얼굴에 와 닿는다. 남자의 코고는 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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